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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북교회

가시밭 속에 핀 카네이션

2012.06.19 20:16

길라잡이 조회 수:1324

가시밭 속에 핀 카네이션

 

                                                                                                                                      오분남 집사

                                                                                                           악양교회(경남 하동군 악양면)

 

본 글은 아래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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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분남 집사님은 평생 구제하며 전도하시다 2009년 11월 12일(목)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월간고신을 읽으면서 많은 은혜와 감격 속에 잠겨있던 중 저도 필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1930년, 돌이켜 생각하면, 나는 가시밭 속에서 기필코 피어난 한 송이 카네이션 꽃이었습니다. 일제시대라 저는 아무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냥 따라서 했습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센세이 사요나라”, “이다다끼마스”, “고치소 사마데스”, “덴노헤이까 반사이” 그르든 어느 날 돌연히 나타난 B-29 폭격기의 폭탄을 피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몸뻬”라는 옷을 입고 귀를 막고 운동장에 엎어지기도 하면서 바쁘게 피난 다니던 그 시절이었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 되던 해 8월 15일, 뜻밖에 죽음의 쇠사슬은 풀리고 자유의 종소리 울리던 그 날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소리와 함께 농촌 부락마다 소를 잡아 마을 잔치를 하면서 기쁨의 자유를 만끽하며 다시는 전쟁 없이 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르던 중에 악양교회에는 박성근 목사님이라는 분이 시무 하시게 되었다. 60세에 고려 신학을 졸업하시고 옥중생활을 겪으신 분이다. 하동 북천면과 정양면의 나환자촌을 거치시고 악양교회를 봉사하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 당시에 나는 이모님 김사엽 집사님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주님을 영접한 후, 주일학교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배웠다. 30세에 과부가 되시어 홀로 3딸을 기르시며, 삶의 목표가 뚜렷하셨던 어머니께 전도를 시작하였다. 어머니 말씀 왈 “너의 아버지 제사는 어떡하고 예수를 따라 믿겠니?” 저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어머니, 전능하신 하나님 믿고 일단 교회 한번 나갑시다.” 우리 어머니의 말씀인즉, “나는 손가락으로 도의 구멍을 뚫는 결심이 있다”하시며, 그 길로 교회에 발을 옮겨 한평생을 우리 지역에 예수님의 빛과 사랑을 몸소 실천하여 베풀어주셨다. 나에게는 끝까지 정직의 교훈을 보여주셨다. 훗날 부산 제2 영도교회에서 신명구 목사님 모시고 권찰로서 봉사하시다가 소천하셨다.

 

물론 인생의 모든 여정이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었겠지만, 가시밭 속에서 미약하고 무능한 저를 불러 주신 것 만해도 감사한데, 따스한 남쪽지방 비옥한 농촌의 땅 하동에 살게 하심을 더욱 감사드린다. 같은 지방의 이름으로 중국에도 있다는 하동의 악양을 살펴보자면, 옥토의 분지로 들판 한가운데는 시내가 흐르고, 서편에는 고소성과 동정호가 있고, 박경리씨의 “토지”로 유명한 최참판 댁이 있으며, 동편에는 높은 구재봉이 푸른 솔로 병풍을 두르고 도로면 30여 부락에는 옛 전설에 거지가 3년을 얻어먹어도 3집이 남더라는 곳이라 했다. 이런 곳에 “안식교”와 “사두개교” 그리고 “남묘호랑교”와같이 이방교도 있지만, 웬 은혜인지 하나님은 저를 다니엘 선교사님이 계시던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는 성경학교로 인도하셨다. 이제는 모두 돌아 가셨지만, 민유수 교장 선생님, 음악을 가르치시던 구 선생님, 기독교 역사의 김옥남 선생님, 정순일 사감 선생님의 사랑스런 보살핌에 다시는 전쟁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호사다마라고 안정 속에 2학년 되던 해의 어느 날 밤이었다. 갑작스럽게 여순 반란 사건의 총탄은 기숙사 방의 벽을 뚫고 들어왔다. 아! 이럴 수가 있는가? 아침 일찍이 반역자 학생들이 선생님들을 잡으러 다니고 동순천 국민학교는 적색깃발이 펄럭이는 채, 민간인들을 세워놓고 총살 또 총살했다. 그때의 쓰라린 마음의 애달픔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사랑의 원자탄이 되신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신이와 동인이는 붉은 사상에 물든 안재선에게 괴롭힘을 다했다. 빨간 완장을 팔에 두른 안재선이 동신과 동인에게 성경책 찢고 침을 뱉어라 했다. 형제간에 서로 서로 형님 살아, 아니야 동생 살아 하며 서로 미루고 있는데 인정 사정없는 붉은 공산당은 무자비하게 총질을 해댔다. 오! 하나님, 어린 영혼들을 받으소서! 시체들을 소 구루마에 싣고 손목사님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부르시며, 완벽한 믿음에 눈물 뿌려 기도하시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이 모습에서 나는 어떤 환란에도 예수님 사랑을 끝까지 전해야 하겠구나하고 굳은 결심을 하게되었다.

 

이제 또 무슨 전쟁이 있을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동족간의 비극 6.25 전쟁이 터진 것이다. 빨치산 부대가 이산, 저 산에 기거하다가 밤에는 식량을 얻으러 민가로 내려와 부락사람들을 못살게 괴롭히고 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엄청난 비극 속에서 선교사님은 일본으로 피난가시고, 성경학생들은 각자 걸어서 고향집으로 향했다.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데, 혼인 연령이 되었다고 결혼 중매가 들어왔다. 나의 어린 마음에 홀로 계신 어머니도 돕고 고향에 있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21세에 결혼하여 교회의 오르간 반주도하고, 유년 주일학교 교사 생활도 하면서 교회를 섬겼다. 시어머니 댁은 조상신의 우상을 섬기는 완고한 가정이었다. 나는 원래 기독교 전도사가 되고싶었으나 6.25가 나의 꿈을 꺾어놓았다. 하지만 생지옥 같은 불신자 가정에서 나는 여순 반란 사건 때의 결심을 떠올리며 전도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하여 나는 결국 불신 가정의 전도사가 된 것이었다.

 

6.25 동란 때 황해도에서 피난오신 김상수 목사님의 권유로 어느 초가을에 앞산 구재봉에 강을생 장로님과 함께 올라, 억새풀을 밟으며 불신 가정의 전도를 위하여 1주일간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주말에 집으로 내려오는데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현기증이 났지만 마음은 성령이 충만하므로 기쁨이 가득했다. 가정의 전통 규례를 따르지 않고 제사 음식을 거부하자, 온 집안 식구들이 제사문제부터 시작하여 나를 물에 기름과 같은 존재라고 구박했으며 따돌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큰 형님 동서 집안에 병마와 불행의 술 귀신이 떠나지 않고 가족들을 괴롭혔다. 남편이 양 약업을 하고 있어서 시 아주버님을 위하여 항상 약을 지어드리고 보혈 주사도 해드리면서 전도를 계속했다. 큰 동서님도 천식으로 고통 속에 마음 편할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나도 분주하였지만 늘 순종하면서 주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도를 꾸준히 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시 아주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말을 걸어 오셨다. “제수씨, 그러면 새벽 기도 다니는 사람만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심방 예배를 드려 주세요.” 오! 주여! 얼마나 감개 무량했던지. 그 길로 기독교 장례식 치르고 가정의 잡신 우상 불태우고 난 후 얼마 안 있어 교회 부흥회가 찾아왔다. 식구들 저녁밥을 일찍 해결하고, 곧장 부락민들을 끌어다가 교회 강댓상 앞에 않아 말씀을 듣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누, 동서, 주님 앞에 손들고 나와 집사로 평생 새벽종 당번으로 봉사하며 성미와 십의 일조가 마르지 않는다.

 

자나 깨나 전도의 불타는 심령의 뜨거운 세월이었다. 1978년 12월 성탄절을 한 주간 앞둔 주일 오후 날이었다. 이주학 전도사님과 함께 성령에 이끌리어 북쪽으로 무조건 전도를 떠났다. 큰 도로를 타고 가는데 지체가 작고 얼굴 색이 어두워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오기에 말을 건넸다. “예수 믿고 삽시다.” 그 분의 대답이 나왔다. “예, 그렇지 않아도 지금 남묘 호랑교를 믿을까하고 가는 중이요.” “그런 미신 따르지 말고 다음 주일 예수 성탄절 날 악양교회로 꼭 나오세요.” 그리하여 크리스마스날 약속 지키고 현권사님의 전주 제단에 가서 위장 암 성령 수술 받고 오늘까지 신앙 생활하는 우리교회 이도순 집사님입니다. 죠지 뮬러의 5만번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 오분남의 미약한 기도 들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듣던지 아니 듣던지 버스타면 전도지 받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택시타면 박카스 1병 주면서 예수 전도하지요. 시골이라 외상 약값 받으면서 해가 서산에 걸릴 때, 만나는 하교 길의 중학생들 붙잡고 예수 전도를 했다. 세상에서 출세를 해도 제대로 하려면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했더니, 학생들 하는 말; “출세를 한다구요? 그런데 가까운데 교회가 있어야 가지요.”라고 대답한다. 나는 그때 눈물이 핑 돌면서 바로 이곳 악양 북쪽에 기도소라도 세워야 하겠다 라고 기도의 뜻을 세우게 되었다. 오, 질서와 순서의 하나님! 오세광 목사님과 현재 파라과이 선교사로 가신 김진호 목사님을 통하여 악양면 북쪽 매계리 마을에 한 가정집이 기도소로 열리게 되었다. 국회의원 김용순님의 누님이신 김연심 집사님이 뜻 밖에 한약방 한 칸을 금요일 기도처로 삼고 예배를 드리라고 허락하셨다. 그후 부산 부민교회 강창석 장로님의 교회 신축 특별 헌금과 악양교회 교인들의 노력 봉사와 여인호 장로님, 이강석 장로님, 강한승 장로님, 그리고 강창곤 집사님들의 감독으로 오늘날의 악양 북교회가 개척 교회로 탄생하게 되었다. 나의 15년간의 줄기찬 기도로 세워지는 악양 북교회를 나는 감동적으로 보게되었다. 나는 이런 기도의 역사를 지켜보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는 김영수 목사님이 시무하고 계시는데 이 지역의 새벽기도 대장으로 일치 월장 교회 부흥이 되고 있는 중이다.

 

교회 제직회 때마다 내 집 근처 다니면서 축호전도, 지역전도하자고 권하고 또 권해야한다. 나는 양다리에 고관절 수술을 받아서 몸이 성치 못하여, 이제 남들처럼 편히 걸으며 자유롭게 전도할 수가 없는 형편이다. 아직 지체가 건강하신 분들은 주님의 부탁을 잊지 말고 힘쓰고 애써서 주님의 사랑을 간증하며 전해야한다. 일상 생활 속에 부닥치는 온갖 불안과 공포의 가시밭 속에서도 가슴속에 한 송이 카네이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인내하고 또 인내해야한다.

 

< 기도의 응답 >

남편은 신 약방을 운영하며 마을 이장 일을 10년 넘게 하면서 불신자들과 함께 친하게 되었다. 그런 생활 가운데 10계명과 시편 1장을 까맣게 잊고 술 취하고 주색 방탕의 길로 나갔다. 하나님과 멀어져있는 남편의 편향된 생활이 나의 관점에는 도무지 맞지 않아 살수가 없었다.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조카를 앞세우고 진주 가정 법원에까지 가보았지만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했다. 하나님이여,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한동안 너무나 마음이 괴로워서 신경성 환자가 되어 있었다. 나의 입에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 섞인 통곡이 나오기도 했다. 하나님이여, 나 같은 인간을 뭐하시러 불러 쓰시는 겁니까? 하고 통곡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아침 금식 15일만에 하나님으로부터 신명기 5장과 빌립보서의 메시지를 듣고 성경을 찾아보니 신명기 5장의 10계명 중 순종하면 복을 받고, 빌립보서가 외치는 소리 기뻐하라가 18번이나 반복되고 있었다. 신경성 환자로 체내의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울화가 목에까지 차 오르고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변비로 고생을 하던 중 마루에서 넘어졌는데 고관절 수술을 해야하는 2중 3중의 고통이 밀려왔다. 부산 침례 병원과 여수 재활 병원을 전전하며 2차 3차의 수술을 계속해야했다. 그 다음에는 자주 코피가 터졌는데 그럴 때마다 현재 보건소에서 근무하고 있는 둘째 딸이 고쳐 주었다.

 

죽으면 죽으리다하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골수염이라는 병이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말로 수술대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이여 이제는 정말로 조용히 저의 영혼을 거둬 가세요 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아직 내가 세상에 숨을 붙이고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결국 남편의 권고로 5번째 수술을 받게 되었다. 회복실에서 깨어날 때 남편의 친구이자 전임 면장이신 박주홍씨가 하시는 말; 보통 불신자들은 깨어날 때 욕설도 한다는 데, 나는 “할 수 있다 하신 주는 의심 말라 하시고 물결위로 걸라 하셨네, 믿음만이 믿음만이 능력이라 하셨네.”라고 몇 번이고 찬송했다고 한다. 남편의 급한 성격에 너무나 위험한 순간마다 하나님은 나를 안전한 곳으로 또는 이웃집으로

항상 숨겨 주셨다. 그러나 세월 따라 나도 너무 지쳤는지라, 지난 2000년에는 늦은 69세의 나이라도 꼭 이혼을 해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떠나갈 보따리를 챙겨놓고 안절부절못하고 지내고 있으면서도 남편을 향한 나의 마지막 기도는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님이여 저의 남편의 술을 끊어 주소서하고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지막 기도까지 기필코 응답하여 주셨다. 아침 금식 1주일 후에 남편과 함께 병원에 가서 확인 받았다. 2001년 봄, 하나님께서는 저의 남편을 술의 세계에서 완전히 갈라 놓으셨다. 지금은 오히려 늦은 나이에도 악양교회의 회계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 경주 이씨 집안에 시집와서 2남 3녀 자녀를 선물로 받아 하나도 잃지 않고 장자와 큰 자부는 중등학교 집사 교사로 교회를 섬기며, 차남은 회사원으로 일하고 교회 일에 앞장서며, 큰딸은 카나다에서 상업을 하며 세계 선교 일에 봉사하고, 둘째 딸은 악양 평촌 보건소장으로 전도 일을 열심히 맡아하고, 막내딸은 피아노 교습을 하며 성악으로 교회를 봉사하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나의 분 복으로 알고 진정으로 감사히 여기며 하나님 데려 가시는 그날까지 은혜 속에 살아가고 있다.

 

나의 한 평생을 통하여 내가 나의 자녀들에게 남긴 것이 있다면, 나의 어머니처럼 자녀들 앞에서 욕설하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고 정직한 믿음으로 해지는 인생 길에서 하늘나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의지하고 오늘도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 끝

 

주후 2003년 3월 16일 주의 날

필자: 오 분남 집사 (경남 하동군 악양면 봉대리 55 후생약방)

악양교회 집사

악양북교회(고신) 경남 하동군 악양서로 582-5 악양북교회 TEL. 055-883-8336